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메이 황후 (문단 편집) == 시어머니로서의 모습 == 맏며느리 [[고준 황후]](나가코)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어머니]]'''였다고 한다.[* 덤으로 [[고준 황후]]부터 본격 [[일부일처제]]가 시작되면서, 그에 대한 황실 [[시집살이]]가 기록되었다 볼 수 있다. 데이메이 황후 시절은 [[후궁]]을 들여도 되었던 시절이나, 당시 천황인 [[다이쇼 덴노]]가 굳이 들이지 않은 것.] 사다코 태후는 [[화족]] 가문의 [[서자|서녀(庶女)]]였지만, [[나가코 황후]]는 방계 황족 가문의 [[적자#s-2|적녀(嫡女)]]여서 출신 신분이 더 높았다는 열등감도 있었다. [[농촌]]에서 뛰어놀며 자라나 활달하고 씩씩한 성격이었던 사다코 태후와, 다소 차분한 성격이었던 나가코 황후의 성격 차이도 있었다. 나가코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 가문이 외척임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굴어 사다코 태후의 미움을 샀던 이유도 있으며, 나가코 황후가 결혼 후 [[공주]]만 줄줄이 4명을 낳았던 것도 [[시집살이]]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를 꾸짖을 때, 좀처럼 직접 대놓고 꾸짖지 않고 늘 [[시녀]]를 통하여 전달하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침을 깨뜨린 적도 있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황태자 부부는 하야마(葉山)에서 요양 중이던 다이쇼 덴노를 문병했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의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장갑]]을 낀 채로 물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고, 사다코 황후는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너는 무엇을 해도 못나게 구는구나!!"'''라고 꾸짖었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무어라고 대꾸할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고, 이 사건은 시종들의 앞에서 [[고부갈등]]을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이후 [[나가코 황후]]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길을 걸어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악질적인 시집살이를 시켰다.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참고.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도 맏며느리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가 아들을 못 낳는다며 고달픈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하니, '''사다코 → 나가코 → 미치코 → 마사코까지 고부갈등의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정정하자면,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는 시할머니 데이메이 황후, 시어머니 [[고준 황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와 갈등이 있던 것은 맞지만, 황실 어른으로서 할 만한 행동이 많았던 터라, 정작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가해진 상식 이하의 유치한 괴롭힘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아닌 [[궁내청]]의 짓이었다. 더군다나 미치코 황후는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코 황태자비가 미치코 황후의 행동을 잘못 이해하여 마음고생 한 적도 많다. 애초에 근대 일본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황실에서 50년 넘게 생활한 여성과, 태생만 일본인이지 외국 각지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서구적 가치관을 형성하며 살아온 여성이 고부관계로 살며 마찰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40여년간 지속된 유치하고 엽기적인 괴롭힘으로 큰며느리를 시집살이시킨 [[고준 황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큰 실례다. 더군다나 데이메이 황후의 경우 맏며느리를 '''사적으로는 싫어했을지언정, 공적으로는 일국의 황후로서 대했다.''' 장갑을 낀 채로 물수건을 짠 걸 빼면 항상 [[시녀]]를 통해서만 꾸중하는 말을 전달하는 등, 맏며느리 고준 황후처럼 일국의 황후라고 보이지 않는 수준으로 공사구별 없이 유치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는 매번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면서까지 큰며느리에게 힘을 실어준 시어머니였다.--결국 고준 황후가 제일 나쁘다.-- 미치코 황후와 마사코 황태자비는 [[후미히토]] 일가의 만행 발각 이후부터 사이가 매우 좋아졌다.] 그러나 그 아래의 [[세츠코 비|며]][[키쿠코 비|느]][[유리코 비|리]]들은 귀여워하여, 종종 불러 식사나 다과를 함께 하였다고 한다. 특히 둘째며느리 [[세츠코 비]]를 귀여워하였는데, 세츠코 비는 매년 [[히나마쓰리]] 때마다 시집올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인형들을 장식하였고, 그것을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함께 감상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세츠코 비는 이후 회고록에서 "아들만 네 분이시니, 말년의 낙으로 삼으셨다."고 언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